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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섬진강은 ‘낮은’ 곳으로 흐르더라

박경만 한겨레신문 기자의 ‘내려놓는 섬진강 트레킹’

“물은 온갖 것을 위해 섬길 뿐, 그것들과 겨루는 일이 없고,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을 향해 흐를 뿐이다.” -노자 <도덕경>

등산가를 자임하는 내가 산이 아니라 왜 하필 강둑길을 걸으려고 했을까. 섬진강변에 매화와 산수유 꽃이 한창일 거란 생각은 했지만 꼭 꽃이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휴식이 필요했고 남녘의 새 봄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내게 가장 좋은 휴식은 가능한 한 오래, 그리고 최대한 힘들게 길을 걷는 일이다. 일주일간 연차휴가를 냈다. 섬진강의 봄은 생명의 축제가 펼쳐진다. 이 계절에 초로의 나는 보잘것없는 삶조차도 힘겨워 버둥거리는 나를 버리겠다고 섬진강을 찾아 나섰다. 

나를 버리러 간다

가장 화창한 봄날,

꽃들이 가장 만발한 봄날

강물이 가장 파란 봄날

바람이 가장 부드러운 봄날

더러운 세상의 끝까지 보이는 환한 봄날

나를 버리러 간다

  -김용택 <저 산은 언제 거기 있었던가> 중에서.


150km 고행길에 야영까지 자처했다. 어둠이 내리는 첫 야영지 전북 임실군 진메마을 앞 강변. ‘물소리·새소리를 듣고 아침을 맞으리’ 했건만 첫 하룻밤 겨울침낭을 안 챙겨온게 후회막급이었다. 하지만 나를 내려놓는 길. 그 길섶의 서리는 반가웠다.

야영과 민박을 놓고 고민했다. 비박을 좋아한 터라 평소 같으면 당연히 야영을 택했겠지만 이번에 걸을 길은 150㎞에 달하는 만만치 않은 여정이다. 야영을 선택하는 순간, 20㎏짜리 배낭을 짊어지고 걸을 각오를 해야 했다. 민박은 수월하게 걸을 수 있지만 강변에 게스트하우스가 없고, 특히 상류 쪽은 마을마저 드문드문 떨어져 있어 민박을 하려면 택시 이용이 불가피했다.

결국 고행 길을 선택했다. 봄바람 휘감기는 섬진강 물소리와 새소리, 바람소리를, 해 저문 강의 정적, 고요한 달빛 사연을 더 가까이서 보고 듣고 만지고 싶어서다.

버스표를 예약하고 짐을 꾸렸다. 야영은 의식주를 모두 챙겨야 해 짐이 많다. 필수품만 챙겨도 80리터 배낭의 절반이 찼다. 공정캠핑 원칙에 따라 모든 먹거리는 현지에서 사기로 하고 빈 그릇과 물주머니만 챙겼다.

짐을 줄이기 위해 DSLR 카메라는 똑딱이로, 헬리녹스 의자는 접이식 간이의자로, 겨울용 침낭(1200g)은 절반 부피의 봄가을용 침낭으로 대체했다. 품위 있는 식사를 위해 마련한 비박용 식탁과 프라이팬, 블루투스 스피커는 가져갈 수 없었다. 가져가고 싶은 것은 많지만 배낭은 좁고 짊어질 몸뚱이는 부실했다.

대신 조금 사치스럽지만 스케치북과 연필 4자루, 만년필, 시집 2권, 휴대용 커피메이커와 원두 200g을 챙겼다. 휴대폰에 피아노소나타와 협주곡 음원을 가득 담았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백석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 중에서.

섬진강은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팔공산(1151m) 데미샘에서 발원한 샘물이 500리(212㎞) 장강을 이뤄 남해 광양만으로 흘러간다. 6박7일간 걸을 코스로 상류인 임실군 강진면에서부터 순창, 남원, 곡성, 구례, 하동을 거쳐 광양 망덕포구까지 150㎞를 잡았다. 완전 종주를 하려면 적어도 사흘이 더 필요했다.

처음 눈길을 끈 곳은 섬진강 시인으로 불리는 김용택 선생이 태어난 임실 진메마을이다. 농사지을 땅이 거의 없는 궁벽한 산골마을 앞으로 놀랍도록 부드럽고 고운 강물이 흐른다. 마을 앞에 긴 산(뫼)이 있어 ‘진메’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시인의 마을다운 이름이다.

진메마을을 지나 캐나다 록키산맥의 ‘레이크 루이스’를 빼닮은 풍광 좋은 강변에 텐트를 쳤다. 산 너머로 저녁놀이 물들고 시인의 마을에 밤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휘영청 보름달이 떠올랐다. 바람조차 싱그러운 봄밤이었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김수영 <봄밤> 중에서.

진메마을에서 천담, 구담마을을 지나 순창 장군목(장구목이라고도 한다)까지 구간은 김용택 시인이 섬진강 500리 물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물길로 꼽은 곳이다.

구담마을은 영화 <아름다운 시절> 촬영지로 이름난 오지 마을이고, 장군목은 산 사이를 굽이치며 수만년 동안 흘러온 섬진강물이 빚어낸 기암괴석의 전시장이다.


영화 <아름다운 시절> 촬영지인 구담마을 앞의 평화로운 풍경. 김용택 시인이 가장 아름다운 물길로 꼽은 곳이다.

그 중 최고 걸작으로는 요강처럼 움푹 파인 ‘요강바위’가 꼽힌다. 한국전쟁 때 빨치산 다섯 명이 토벌대를 피해 이 바위 속에 숨어 목숨을 건졌다는 일화와 함께, 아이를 못 낳은 여인들이 요강바위에 들어가 지성을 드리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신비로운 바위다.

적성강으로 불리는 적성교 인근 둔치에서 보낸 이틀째 밤은 강바람이 차가웠다. 아무리 남도라지만 만만히 볼 날씨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텐트에 서리가 하얗게 쌓였다. 짐을 줄이려 겨울용 침낭을 두고 온 것을 마지막 날까지 두고두고 후회해야 했다. 옷을 껴입고 뜨거운 물통을 껴안으면 밤은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지만 동트는 새벽 바람까지는막을 수는 없었다.

향가리 터널을 지나면 남원땅이다. 가능하면 강둑을 따라 조성된 자전거길 보다는 옛길, 흙길, 논둑길을 걷고 싶었지만 걸을만한 길이 많지 않았다.

4대강 사업을 하며 하천둔치 농사를 전면금지한 바람에 제방 안쪽의 논밭과 논둑길은 잡초와 갈대밭으로 변해 있었다. 콘크리트를 밟는 발바닥이 배낭 무게에 눌려 화끈거렸다. 힘들게 산길을 걸어 오후 6시에야 남원 금지면과 곡성읍 경계인 금곡교 옆 물가에서 짐을 풀었다. 힘들고 외로웠다. 

 아 그렇게도 눈물 나리라.

 한 줄기의 냇가를 들여다보면

 나와 거슬러 오르는 잔 고기떼도 만나고,

 그저 뜨는 마름풀 잎새도 만나리라.

  -고은 <눈물> 중에서.

지척에 곡성을 두고 다리를 건너기 위해 물길을 거슬러 한참을 돌고난 뒤에야 곡성군 고달면에 들어섰다.

다리 하나를 건넜을 뿐인데 사람들 말투가 바뀌었다. 같은 전라도인데도 북도는 느릿느릿한데 남도는 빠르고 직설적이다. 곡성 쪽 강변은 한눈에 봐도 기름진 농토들이 제법 많다. 봄꽃들이 한창 피어나고 강도 산도 마을도 사람들 표정도 여유롭고 푸근하다.


전북 순창군 적성면 화탄잠수교. 순창 사람들은 이곳에 흐르는 섬진강을 적성강이라고 부른다.

중간에 식당이 없고 밥해먹기도 귀찮아 생라면을 씹어 먹으며 23㎞를 걸어 압록에 도착했다. 다리 밑 말고는 야영지가 마땅치 않았다. 생라면으로 점심을 때운 터라 다리 밑으로 내려갈 기분이 아니었다. 다행히 압록은 관광지라 숙박업소가 많았다. 민박집에서 뜨거운 물에 사워하고 밀린 빨래까지 해결했다. 실내온도를 28도에 맞춰놓고 한뎃잠에 시린 등을 지졌다. 행복했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꽃 색깔이 더 화사하다. 압록에서 구례구역까지 9㎞는 산수유꽃이 활짝 피었다. 구례구역은 구례에 있지만 행정구역상 순천 땅이어서 구례역이란 이름을 못쓰고 입구(口)를 뜻하는 사족을 달게 됐다.

지리산을 볼 수 있는 구례 구간은 아름답지만 걷기에는 부적합한 길이다. 직선의 둑방길은 상상력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고, 둑방길을 벗어나면 인도 없는 지방도가 10㎞이상 이어진다. 바퀴 10개 달린 트럭들이 쉴 새 없이 오가는 도로에서 보행자를 위한 배려는 없다. 수달이 산다는 간전교 인근 강변 갈대숲에 야영지를 잡았다. 물가에서 바라보는 촉촉한 저녁놀은 아름다웠고 밤하늘별이 총총했다.

갈대숲에서 수달과 보낸 하룻밤은 낭만적이었지만 텐트속 물이 꽁꽁 얼 만큼 몹시 추웠다.

택시를 타고 인도 없는 지방도를 벗어나 남도대교에 도착하니 광양땅, 매화세상이 열린다. 지리산 자락의 계곡 물이 유입된 때문인지 하류로 내려올수록 섬진강물은 더 맑고 투명한 색깔을 띤다.


전남 광양시에 들어서면 매화세상이 펼쳐진다. 하류 쪽에는 모래가 많아 강 너머 하동사람들은 다사강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경남 하동 송림. 750여 그루의 노송이 섬진강 백사장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연출한다.

드넓은 백사장과 갓 물이 오르기 시작한 연둣빛 수양버들을 배경으로 활짝 핀 매화는 한 폭의 그림이다.

마지막 야영지는 섬진교 건너편 하동 소나무숲이다. 매화축제에서 만난 광양시청 공무원이 “관광객들이 놀기는 광양에서 놀고 돈은 하동에서 쓴다”고 하소연하면서도 야영지로 하동 송림을 추천해줬다. 아름드리 소나무 숲과 침대처럼 푹신한 잠자리가 5성급 호텔보다 더 편하고 황홀했다.

종착지인 망덕포구에 가까울수록 강은 바다로, 모래는 개펄로 변해갔다. 집에 돌아와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니 삶이 가벼워져 훨훨 날아갈 것만 같다. 노자가 왜 ‘물같이 살라’고 했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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