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청은 26일 조선 후기 후불도인 합천 해인사 영산회상도와 김천 직지사 석가여래삼불회도를 국가지정문화유산 국보로 지정했다.
또 나전국화넝쿨무늬상자, 서울 흥천사 목조관음보살삼존상, 화성 용주사 감로왕도, 양양 선림원지 출토 금동보살입상,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을 국가지정문화유산 보물로 각각 지정했다.
1997년 보물로 지정됐다가 이번에 국보로 지정된 합천 해인사 영산회상도는 화면 하단의 화기를 통해 1729년(조선 영조 5)이라는 제작 연대와 의겸을 비롯해 여성, 행종, 민희, 말인 등 제작 화승들을 명확히 알 수 있는 불화이다.
국보로 지정된 합천 해인사 영산회상도(陜川 海印寺 靈山會上圖).(ⓒ뉴스1)
이 가운데 제작 책임자 격인 의겸을 붓의 신선인 ‘호선’이라는 특별한 호칭으로 기록해 그의 뛰어난 기량을 짐작할 수 있다.
화기는 불화 하단에 제작 연대, 봉안 장소, 제작 목적, 시주자, 제작자 명단 등을 적은 것이고 화승은 불화를 전문적으로 그리거나 회화 작업에 종사하는 승려다.
합천 해인사 영산회상도는 비단 바탕에 채색으로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했는데, 가운데 석가여래는 크게 부각하고 나머지 도상들은 하단에서부터 상단으로 갈수록 작게 그려 상승감을 표현했다.
전체적으로 조선 후기 불화의 색채를 유지하면서도, 제자들의 얼굴 표현, 그리고 세부 문양에서는 조선 전기 불화의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
김천 직지사 석가여래삼불회도는 1980년 보물로 지정됐다가 이번에 국보로 지정된 조선 후기 후불도로, 중앙의 영산회상도, 좌측의 약사여래설법도, 우측의 아미타여래설법도 3폭으로 구성돼 있다.
현존 삼불회도 중 3폭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규모가 큰 작품으로, 세관을 비롯해 신각, 밀기 등의 화승들이 1744년(조선 영조 20) 완성해 직지사 대웅전에 봉안했다.
이 작품은 조선 후기에 유행한 공간적 삼불회도의 전형으로 평가받는 불화로, 장대한 크기에 수많은 등장인물을 섬세하고 유려한 필치로 장중하게 그려냈다.
3폭 모두 사방 테두리 부분에 조상경에 근거한 원형의 범자문 진언을 배치해 상징성을 부여한 점도 주목된다.
조상경은 불상 조성에 관한 의식과 절차를 정리한 불교 의례서이고 범자문 진언은 고대 인도문자인 산스크리트 문자로 된 것으로 불교의 진실되고 거짓이 없는 주문이다.
세 폭의 하단에는 제작에 참여한 화승들의 정보가 담긴 화기가 있는데, 이를 통해 직지사 화승 외에 인근 사찰의 화승들이 다수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번에 보물로 지정된 나전국화넝쿨무늬상자는 국가유산청이 지난해 일본에서 환수한 유물로, 뚜껑과 몸체, 안쪽에 공간을 분리하는 속상자로 구성돼 있다.
보물로 지정된 나전국화넝쿨무늬상자.(ⓒ뉴스1)
침엽수 계통의 나무로 만든 백골 위에 천을 바르고 그 위에 골회를 입혀 자개를 붙인 다음 여러 번 옻칠해 마감하는 전형적인 고려 나전칠기 제작 방식인 목심저피법으로 제작됐다.
표면에는 전체적으로 모두 770개의 국화넝쿨무늬를 배치했고, 부수적으로 마엽무늬, 귀갑무늬, 연주무늬를 사용했다.
마엽무늬는 원을 중심으로 한 수평, 수직, 사선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기하학적 무늬이고, 귀갑무늬는 거북의 등딱지 모양을 띤 무늬이며, 연주무늬는 점이나 작은 원을 구슬을 꿰맨 듯 연결해 만든 무늬다.
서울 흥천사 목조관음보살삼존상은 조성발원문을 통해 1701년(조선 숙종 27)이라는 제작 연대, 수조각승 법잠을 비롯한 계초, 진열 등의 제작자, 임실 신흥사 적조암이라는 원봉안처 등을 명확히 알 수 있는 불상이다.
현재 흥천사 대방에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이 언제 임실 신흥사 적조암에서 서울 흥천사로 옮겨졌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1890년 흥천사 수월도량 정비 과정에서 대방에 모셔져 있던 관음보살상과 남순동자상, 해상용왕상 등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그 이전에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대방은 기도하는 수행공간과 공양하는 생활공간이 결합된 복합 공간이고 수월도량은 물에 비친 달과 같은 도량이라는 뜻으로, 관음보살을 모신 곳을 의미한다.
남순동자는 화엄경에 등장하는 불도를 구하는 보살로,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표현되며 남쪽으로 순례를 떠나기 때문에 남순동자라고 한다.
수조각승 법잠은 조선 후기 조각계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조각승이지만 함께 조성 작업에 참여한 계초와 진열은 18세기 조각계에서 매우 비중 있는 조각승이다.
따라서 이 불상은 이들의 조각승 계통의 형성과 전승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으며, 특히, 1701년 작품으로 18세기 불교 조각의 첫 장을 연다는 미술사적 의의도 있다.
또한, 해당 유물은 수월도량의 주불인 관음보살과 남순동자, 해상용왕으로 구성된 매우 드문 삼존상이다.
조선 후기와 말기에 편찬된 의례집에서는 관음보살과 남순동자, 해상용왕이 관음보살삼존으로 언급되는데, 이 불상은 이보다 시대가 앞서기 때문에 의례집 간행 이전부터 성행한 관음보살삼존도상과 신앙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이다.
화성 용주사 감로왕도는 화기를 통해 1790년(조선 정조 14)이라는 제작 연대와 상겸, 홍민, 성윤, 유홍, 법성 등 제작 화승을 명확히 알 수 있는 불화이다.
정조는 1789년 아버지 장헌세자(1735~1762)의 무덤을 화성으로 옮겨 현륭원으로 조성하고,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하는 사찰인 원찰로 용주사를 창건한 뒤 이곳에서 수륙재를 개최했는데, 이 수륙재에 사용할 목적으로 제작한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수륙재는 불교에서 물과 육지를 헤매는 영혼과 아귀를 달래고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의례이다.
조성 후 대웅보전에 모셔졌던 이 작품의 상단에는 불·보살의 강림을, 하단에는 음식을 베푸는 시식 의식과 무주고혼을 배치해 천도 의식을 통해 불·보살의 구제를 받아 망자가 천도하는 과정을 유기적으로 표현했다.
무엇보다 화면 하단에 그려진 죽음의 장면 중에는 18세기 풍속화를 연상시키는 여러 장면들과 당시 유행했던 소설 삽화에 영향을 받은 표현이 있어 조선 후기 불화에 미친 일반 회화의 영향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화성 용주사 감로왕도는 화면의 안정된 구도나 세부 표현 기법에서 완성도가 높으며, 18세기 후반 불화에 수용된 일반 회화의 양상만이 아니라 불교의 구제신앙과 유교의 효사상이 결합하는 양상을 보여주는 정조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양양 선림원지 출토 금동보살입상은 2015년 강원도 양양군 선림원지의 승방터로 추정되는 곳에서 발굴된 작품이다.
금동보살입상이 출토된 선림원은 통일신라기 선종의 요람으로, 존속 기간이 길지 않지만, 9세기 불교사에서 뚜렷한 흔적을 남긴 순응(?∼?), 염거화상(?∼844), 홍각선사(814∼880) 등이 머물며 그 계보를 이어간 역사적 의의가 큰 사찰이다.
이 작품은 이례적으로 광배와 대좌까지 온전히 갖춘 희귀한 사례이며, 광배를 포함한 높이가 66.7㎝로, 정확한 출토지를 알 수 있는 발굴품 중 가장 큰 보살상이다.
광배와 대좌 장식 일부가 떨어져 나간 상태이지만 전체적으로 도금이 거의 벗겨지지 않아 상태가 양호하다.
광배는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성스러운 빛을 형상화한 것이고 대좌는 불상을 올려놓는 받침이다.
보살상, 광배, 대좌, 영락 심지어 정병도 각각 별도로 만들어 탈부착이 가능하도록 제작했으며, 머리카락은 남색 안료로 칠하고 얼굴의 눈썹과 눈, 콧방울, 수염, 머리카락과 이마를 경계 짓는 발제선 등을 먹으로 그려 넣었다.
또한 보살상의 얼굴에서 보이는 도드라진 윗입술 표현과 입체적인 옷주름, 천의와 낙액 등은 9세기 보살상의 우수한 조형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영락은 보살의 목이나 팔 등 몸에 걸치는 구슬로 꿰어 만든 장신구이고, 낙액은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까지 대각선으로 걸쳐진 띠이다.
정병은 깨끗한 물을 담는 물병으로 불교에서 사용된 기물인데 수행하는 승려가 지니는 물건 중 하나였으며, 부처 앞에 깨끗한 물을 담아 바치는 불교 공양구이다.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은 여러 경전에 들어 있는 참회의 방법과 내용 등을 일정한 체계로 엮은 ‘자비도량참법’을 후대에 다시 교정하고 정리한 것이다.
이번에 보물로 지정된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에는 조선의 문신인 김수온이 쓴 발문이 남아 있어 이 책을 찍기 위한 목판을 1474년(조선 성종 5) 세조 비 정희왕후가 돌아가신 세종과 소헌왕후, 세조와 아들 의경왕(후일 덕종), 예종, 성종 비 공혜왕후 등의 극락천도를 기원하며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481년(성종 12)에 인쇄하며 적은 발문을 통해 예종 계비 안순왕후가 양조모인 신숙화의 처 김씨의 영가천도를 위해 펴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왕실이 발원해 제작을 주도한 왕실판본으로, 간행과 인출 시기 및 목적까지 명확해서 의미가 있다.
문의: 국가유산청 문화유산국 문화유산정책과(042-481-4886)